워드월드 1 -  라이큐 지음, 솔 그림/디앤씨미디어(D&C미디어) |
가문에서 파문당한, 세상이 '글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살신류 남자 아이와 어떤 계기로 인해 이중인격자로 변해버린 여자아이. 그리고 앞의 남자아이를 극존칭어까지 써가며 보살피는, 그러나 실력만큼은 일류인 피가 이어지지 않은 누나들이 펼치는 전기물…인데 좀 깔게 한 두가지가 아닌게 문제라면 문제인 작품.
소위 먹혀들만한 소재를 끌어온 건 그렇다쳐도, 전개마저 왕도를 벗어나지 못해 식상, 아니 진물이 날 정도로 지겹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 이 소설의 주인공인 파랑은 모든 일에 무관심한 소년입니다. 소꿉친구인 성아 이외는 어떤 이와도 교류가 없고 집은 그저 자는 곳. 학교는 졸업을 위해 다니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장소들. 언제나 무관심한 표정으로 세상 자체를 그저 회색 덩어리로 밖에 안 보는 소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인해 10살 이후로 세계의 모든 구성물이 글자로 밖에 보이질 않거든요. 책상이면 책상, 딱딱하다, 베이지색, 튼튼하다, 이런 식의 그 구성물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책상의 형태로써 보이는 식으로(인간도 마찬가지)
자, 이런 소년이 있고 그 소년이 주인공이라면 대체적으로 이런 식의 전개가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 밖에 모르던 소년이 적을 맞아가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점점 인간으로서, 나는 혼자가 아닌 걸 깨달아가는 이야기. 또 하나는 점점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 자아마저 붕괴되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워드 월드는 전자입니다. 전자인데 끝을 향해 달려가는 방법도, 중간중간 숨쉬고 뒤를 돌아보는 때라던가 방법도, 다 어디선가 봤던 것들이란게 문제인거죠. 이런 책을 읽었는데 여기선 이게 괜찮네, 저런 책을 읽었는데 또 저기선 저게 괜찮네. 그럼 막 끌어옵니다. 전체적인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게끔 해서.
장르문학의 범위(솔직히 말해 이 작품을 이 범위에 올리고 싶은 마음은 한치도 들지 않지만) 속하기에 설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설정은 말그대로 설정일 뿐 이야기의 모든 것은 절대 될 수가 없거든요. 막말로 아무리 설정이 3류 고딩 이세계 난입 판타지라 하더라도 '잘 쓰면'(이 단어의 의미 자체는 매우 포괄적이지만) 좋은 작품이 되는 거고 세계관이니 설정을 몇년에 걸쳐 세밀하게 짜놨어도 이야기를 이상하게 이끌면 그저 3류 양아치 소설 밖에 안되는 것처럼요. 사실 이야기라는 거, 누군가의 것을 보고 거기서 끌어올 수 밖에 없습니다. 글을 쓰는 데 다른 이의 작품을 단 한편도 안 읽고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절대 무리에요. 오죽했으면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다른 작가들의 장점을 흡수하라고 까지 할까요. 문제는 흡수를 하는 건 좋은데 그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안그럼 그게 글일까요? 마치 하기는 귀찮고 널려는 있으니 이곳저곳에서 ctrl+c -> ctrl+v를 해 짜집기한 레포트나 마찬가지지.
비교를 하기엔 그렇지만 비슷한 레이블로 예를 들자면 물건너에서 나온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병약한 미소녀와 마찬가지로 몸이 약해 입원한 소년 사이에 일어나는 애틋한 사랑을 주요 테마로 다룬 작품인데, 이 작품도 설정 자체는 무난하다 못해 한 눈에 봐도 딱 전개가 예상되고 결말이 눈 앞에서 그려지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되고(저 또한) 화자되는 갈꺼요? 다른 거 필요없습니다. 독자가 빠지다 못해 너무 안타까워서 어쩔 수 없을 만큼의 필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으니까요.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같은 레이블에서 나온 해한가를 보도록 하죠.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또한 진부하기 그지 없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외롭다. 혼자여도 외롭고 둘이여도 외롭다. 왜냐하면 둘이 됬든 셋이 됬든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 사랑이라는 힘으로. 이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5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끈질기게, 진득하다 싶이 풀어낸 해한가는, 단점이다 싶은 부분을 오히려 계속해서 끌어내고 다루어 장점으로 바꾼 작품입니다. 맛이 강렬해 처음 먹어보면 앞으로 잊지못할 음식처럼(물론 이 강력한 맛을 계속해서 음미할 수 있을까 하는 단점도 있지만 이건 다른 얘기니 다음번에)
그런데 이 워드 월드는 이야기를 하는 방법과 이끌어가는 힘에 관해서도 개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식의 전개를 펼쳐나가고 있으니… 차라리 무난한 설정을 이끌어 왔으면 이걸 더 발전시키거나 꾀어서 설정만으로도 이야기가 가능한 시점까지 끌어올리던가(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작품만의 특색은 생길테니까) 아니면 이야기를 자기만의 개성을 살려 이끌던가... 이도 저도 아닌게, 꼭 대충 그럴싸하게 보이는 비빔밥을 맛있는 줄 알고 먹었다가 실망해 꾸역꾸역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더 파악(깔거리)하기 위해 끝까지 참고 읽은 게 용이할 정도. 작품 자체가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있어 까고 싶은 마음 조차도 들지 않았던 마부라호보단 낫지만... 실상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
한마디로 말해 어떤 설정을 가지고 끌어오던 간에, 이야기를 잘 해야 한단, 기본 중에 기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망만을 잔뜩 준 채 말이죠.
|
http://thebluesky.egloos.com2009-11-06T11:03:400.3210